'뻔한 이야기'는 있어도 '뻔한 화술'은 없어야 한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멋이 없다. 기쁜 마음으로 첫눈을 맞는 사람은 있어도 마지막 눈이 내린 날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이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면, 잊혀지는 사람은 억울하다. 사람들은 그래서 이야기를 만들고, 역사를 남긴다. 우리 역사 속 먼지 쌓인 이야기를 꺼내 새 옷을 입혀 온 서울예술단이 네 번째 가무극을 만들었다. 이번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창업자 소서노에 관한 이야기다.
서울예술단 전매특허 ‘가무극’,
네 번째 무대에서도 역시나!
가무극 ‘소서노’는 주몽 신화에 가려진 소서노의 영웅적 일대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졸본의 공주 ‘소서노’는 왕위를 찬탈하려는 ‘연무발’의 음모로 태어나자마자 불에 던져진다. 제왕의 운명을 타고난 ‘소서노’는 물의 기운으로 목숨을 구하고, 신관(神官) ‘주렴’의 기지로 왕궁에 다시 돌아온다. ‘소서노’는 숲에서 만난 ‘주몽’과 함께 ‘연무발’을 제거하고 고구려를 창업한다. 전쟁으로 국력을 키우려는 ‘주몽’과 달리 ‘소서노’는 화평과 포용의 이념으로 국가를 경영한다. 두 사람은 갈등하고, 고구려 역시 분열된다. ‘소서노’는 고구려를 위해 ‘주몽’의 장자인 ‘유리’에게 왕위 계승권을 넘기고 새 땅을 찾아 떠난다.
연기, 무용, 합창, 연주를 팀별로 운영하는 서울예술단의 장기(長技)는 네 번째 가무극에서도 빛을 발했다. 노래(음악)와 춤, 이야기가 공존하면서도 독립성을 갖춰 옹골진 구색을 띠었다. 웅장한 합창은 마치 관객이 무대 위에 함께 있는듯한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악기를 베이스로 한 울림은 긴장감이 고조될수록 몸집을 불려 공간을 압도했다. 단차를 강조한 무대는 드라마의 전개에 따라 숨 고르듯 오르내리며 입체감을 더했다. 배경영상은 숲, 물가, 밤하늘 등으로 시시각각 변하며 신비하고 세련된 멋을 풍겼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불길도 물을 만나면 그 위세가 꺾이고, 천길 강물도 이글대는 태양 앞에서는 바닥을 드러낸다. 물과 불의 이미지를 입은 ‘소서노’와 ‘주몽’은 섞일 듯 섞이지 않는 안타까운 운명을 대변한다. 작품은 캐릭터뿐만 아니라 전개 과정에서도 극명한 대비를 사용한다. 1막은 신화의 시대, 2막은 역사의 시대라는 정반대의 정체성으로 서사를 끌어간다. 시각적, 청각적으로 분명하게 느껴지는 차이점은 방대한 분량을 수용해야 하는 관객의 부담을 덜어준다.
첫인상은 합격, 포장 벗기면 ‘글쎄’
받는 사람이 선물의 내용을 알고 있다면, 주는 사람은 그럴듯한 멘트로 승부를 봐야 한다. 가무극 ‘소서노’는 여기서 실패했다. 여성의 리더십은 왜 항상 타자를 품고 이해하는 ‘모성’을 돌파하지 못하는지도 답답했다. 극적 장치가 결여된 스토리는 권력을 양위하고 고구려를 떠나는 ‘소서노’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서울예술단의 출중한 기본기만으로는 채우기 힘든 3시간이었다.
1막의 주류를 이루는 액션 장면은 다소 매끄럽지 못했다. 동시다발적인 군무가 많아 시선이 분산되기도 했다. 와이어를 활용한 공중 액션은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고 오히려 산만했다. ‘소서노’가 ‘주몽’을 구하고 ‘연무발’을 물리치는 분수령이 되는 장면이지만, 득보다 실이 많은 연출이었다.
정해진 수순에 따라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이야기는 생략하긴 쉬워도 함축하긴 어렵다. 가무극 ‘소서노’는 무려 작품의 제목을 차지한 유일무이한 캐릭터를 맛깔스럽게 살려내지 못했다. 물론 신탁-음모-모험-승리로 이어지는 신화의 기본 골격은 변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신화적 플롯은 인위적으로 손을 대는 순간 본질을 잃을 수 있다. 방법은 한두 가지로 좁혀진다. 판타지를 극대화하거나 독보적인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이다. 영웅을 이야기하는 가무극 ‘소서노’는 진짜 ‘소서노’처럼 대범하지 못했다.
‘소서노’를 향한 예언에는 부정적 요소(졸본을 무너뜨릴 자)와 긍정적 요소(더욱 강대한 새 나라를 세울 자)가 동시에 들어있다. ‘연무발’은 두려움에 휩싸여 추격과 학정을 자행하지만, 이는 ‘소서노’가 악의 무리를 처단하고 새 시대를 여는 도화선이 된다. 여기서 ‘소서노’를 드라마 ‘선덕여왕’의 ‘덕만’이나 영화 ‘십계’의 ‘모세’로 바꾸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면, 답은 분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