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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커처 타임캡슐을 열다 (上)

김세인 기자

기사입력 : 2017-05-0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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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커처란 무엇인가?"

우리 중 대부분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자세한 설명보다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신문 한켠에 있는 유명 인사, 정치인 등을 그린 시사 만화나 TV 광고 등 우리는 캐리커쳐를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이처럼 캐리커쳐는 우리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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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커처는 라틴어의 '카리카레(caricare)'에서 나온, 이탈리아 어원 '카리카튜라(caricatura)'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카리카튜라'의 일반적인 의미는 '고의적으로 과장하여 닮음'으로 이해된다. 이론적 근거는 16세기 말, 이탈리아 미술가 카라치형제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인물 초상화를 그릴 때, 동물의 얼굴에 사람의 몸을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에 캐리커처 속 인물들은 의도적으로 변형되고 장난스럽게 왜곡됐다.

이 당시 프랑스에서는 '과장하다, 짐을 지우다'라는 의미를 가진 명사 'charge'와 현재 사용되고 있는 단어 'caricature'를 혼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사용되는 '캐리커처'는 영어식 발음이며, 실제 용어는 프랑스어 발음인 '카리카튜'가 더 적절하다.


■ 과장의 미술

"그것은 색채와 사람 그리고 행동을 수단으로 종이나 캔버스 위에 그린 하나의 재현이다. 그 속에서 진실성과 명확히 닮음은 다만 웃음을 통해서 감동을 준다. 결국, 그것은 가능한 과장이 가장 강렬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디드로

프랑스 문학가며 철학자인 디드로는 '카리카튜의 과장'을 칭송했다. 디드로의 말처럼 캐리커처는 '과장의 미술'로 정의할 수 있다. 과장의 미술은 두 가지 형식으로 발전했다. 하나는 이탈리아 카라치 형제의 그림처럼 유머러스하고 과장된 초상화 형태이며, 다른 하나는 18세기 런던과 19세기 파리에서 발전한 사회풍자 캐리커처이다.

고야 =음악의 밤 캐리커쳐 이미지 확대보기
고야 =음악의 밤 캐리커쳐

사회풍자 캐리커처는 석판화의 발명으로 광범위한 대중성을 얻게 됐다. 석판화는 캐리커처의 선을 더욱 세밀하게 했으며, 선명한 명암으로 캐리커처의 풍자적 내용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시대 많은 화가들이 캐리커처 작가로 활동했다. 로돌프 퇴퍼, 프란시스 고야, 윌리엄 호가 등이다. 이들은 화가보다 오히려 캐리커처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캐리커처란 외형적 측면에서는 '인간형태의 과장'이며, 내용적 측면에서는 외형적 과장을 통한 시대와 사회 풍자미술이다. 캐리커처는 사회 혹은 민중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공감대 형성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에 오늘날 캐리커처의 정신은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방송·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사회의 모순과 불합리가 다시금 캐리커처의 정신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제 캐리커처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스 로마의 캐리커처

■ 캐리커처의 시작, 동굴 벽화

캐리커처에 대한 명확한 개념과 정의는 존재하지 않지만, 캐리커처의 형식적·내용적 특성을 원시 예술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라스코 동굴벽화 수렵도 이미지 확대보기
라스코 동굴벽화 수렵도

미술의 시작이라 하는 라코스 동굴벽화를 예로 들어보자. 라코스동굴의 소, 말 그림은 전형적인 원시 자연주의 경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미술적 요소보다 역동적인 만화적 특징을 먼저 읽어낼 수 있다. 마치 현대 스냅사진을 보듯 동물들의 동작묘사가 절묘하다.

또한, 동물의 정지동작과 역동성을 효율적으로 그리기 위해 동굴 벽면의 굴곡을 철저히 이용했다는 점은 이미 제식의 차원을 넘어선다. 결국, 라스코 동굴벽화의 만화적 데생을 통해, 미술보다 만화가 먼저 고대 예술의 서막을 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리스 영웅신화와 민중연극, 미무스

그리스 예술은 그 이전의 원시 시대의 예술처럼 종교적 의미에 바탕을 둔 집단적 예술이었다. 대부분 주문이나 신탁의 일종으로 축복이나 기원을 위한 음악과 시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시인 호메로스의 등장으로 그리스 예술은 영웅신화로 변화하게 된다. 영웅신화가 예술의 주제가 되면서 상류 사회를 점유했던 무사계급의 자유분방하고 세속적인 전투행적이 모든 예술의 대상이 됐다.

이 시대의 예술은 전쟁터에서 싸우고 돌아온 무장을 위로하고 찬양하면서 그들의 영웅심리를 돋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상적인 것을 소재로 한 예술은 비천하고 쓸모없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 아테네의 비극은 내용이나 소재 면에서 지극히 귀족적이었다. 특히 영웅신화나 영웅의 비극에 자신을 동일화하고, 비극미를 이해하는 것은 귀족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편, 민중들 사이에서는 희극적인 예술 '미무스(mimus)'가 등장한다. 미무스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에 시장이나 개인저택에서 연출됐던 구연(口演), 곡예, 촌극을 말하는 것으로 실생활을 취재하여 흉내와 춤으로 표출한 일종의 광대·익살극이다.

미무스는 일상생활에서 가져온 주제와 인물을 토대로 극을 만들어 관중을 훈계, 교육하기보다 단지 즐거움을 주고자 했다. 이에 아테나와 로마 희극은 물론, 고대 풍자미술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 로마 캐리커처의 시작, 카라칼라 소상

로마 귀족문화에 비해 미비하지만, 민중들 사이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발전했다. 바로 로마 시대에도 풍자그림 혹은 조각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 예로 카라칼라 소상을 들 수 있다. 카라칼라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동생 게타를 죽인 후 그 측근들을 숙청해 민중들에게 비판받은 황제다. 카리칼라 소상은 캐리커처 역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소상의 특징은 한 손에는 케이크 바구니를 들고, 다른 손으로 그것을 나눠주는 황제 카라칼라를 월계관을 쓴 난쟁이로 묘사했다.

카라칼라 소상이미지 확대보기
카라칼라 소상

카라칼라 소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로마 풍자미술은 내면적인 정신을 표현하고자 외형적인 면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 외형적으로 사실적인 것마저 과장해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게 그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희극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서, 이것을 완성된 캐리커처라고 보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


■ 인간과 동물의 결합, 희화화의 전형

제임스 베리 =아킬레우스의 교육 이미지 확대보기
제임스 베리 =아킬레우스의 교육

고전예술에도 캐리커처 적 요소는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는 '인간과 동물의 결합'이다. '인간과 동물의 결합'을 다룬 우화는 이집트 파피루스에서도 발견됐다. 신체는 인간에서 빌려 왔지만, 머리는 동물에서 빌려 왔다. 그림들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이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인간과 동물의 결합'을 다룬 신화로는 그로테스크한 이집트 신 베스, 말과 인간의 결합인 반인반수의 켄타우로스, 인간과 염소의 결합인 목신(牧神) 등이 있다.


■ 인물 캐리커처의 시작, 그리스·로마 가면극

로마근교 티볼리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빌라에서 발견된 연극 가면이미지 확대보기
로마근교 티볼리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빌라에서 발견된 연극 가면

풍자미술이 일상적 장식물에서 벗어나 사회적 범위로 확대될 수 있게 만든 것은 바로 연극이었다. 연극은 풍자미술에 많은 희극적 요소를 부여했다. 연극의 희극적 요소는 연극과 관련된 다양한 소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그로테스크하게 과장한 가면은 풍자미술에 많은 영향을 줬다. 또 가면은 인물의 전형화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술 취한 무례한 노예, 화난 아버지 등으로 묘사된 가면장식은 하층민과 풍자를 대변하는 전형적인 캐릭터였다.


중세캐리커처와 종교개혁

■ 중세 캐리커처, '초자연적 환상주의'

중세 시대는 5세기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난 15세기까지로 1,000년이라는 긴 기간이다. 긴 기간임에도 중세 캐리커처의 특징은 '초자연적 환상주의'로 축약할 수 있다.

중세 환상주의는 중세 교회 건축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하다. 중세 교회 건축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모자이크와 스테인드글라스로 대표되는 중세 미술의 신성함과 화려함이다. 그에 반해 교회 건축 외벽을 둘러싼 동물상과 악마상은 교회의 신성함을 땅으로 끌어 내린다. 동물상과 악마상은 중세 환상주의의 시작과 끝이 된다.

노트르담 성당의 악마상이미지 확대보기
노트르담 성당의 악마상

왜 신성해야 할 교회 건물에 '동물상'과 '악마상'을 장식했던 것일까?
이는 신성함만을 고집하던 사제들에 대한 비사제 계급이나 교회를 건축한 장인들의 반감 표현이었다. 결국, 장인들은 가톨릭 사제에 대한 패러디를 동물상으로 대신해서 표현했고, 당시의 민중적 신앙에 깔린 원죄와 단죄에 대한 표현을 악마상으로 표현했다. 즉 악마 이야기는 인간의 사악과 부패에 관한 우화였다.


■ 중세 환상주의의 정점, '춤추는 죽음'

중세 후기에는 죽음을 다룬 우화들이 유달리 많았다. 그런 우화 중 가장 널리 보급된 주제는 '춤추는 죽음(혹은 '죽음의 춤')'이었다. '춤추는 죽음'은 중세 후기를 지배했던 상징이었다.

'춤추는 죽음'은 당시 유럽을 황폐화 시킨 '검은 죽음(페스트)'의 반작용으로 나타났으며,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경고할 목적으로 마임이나 행위예술 그리고 교회 설교를 위한 시청각 교구로 교회 집회에서 자주 이용됐다.

'춤추는 죽음'이 이토록 성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죽음이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춤추는 죽음'은 '만인평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고통받는 민중도, 왕도, 부자도 죽음을 막지 못한다. 그래서 춤추는 죽음은 철학적이며, 보편적인 교리를 담고 있는 주제다.

춤추는 죽음의 이야기의 발전은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의식에서 시작했다. 실제로 죽음을 알리는 사람의 마을 순회는 1690년경 까지 파리에서 행해졌다.

알브레드 레텔 =춤추는 죽음 이미지 확대보기
알브레드 레텔 =춤추는 죽음

'춤추는 죽음' 이야기의 공통 소재는 해골이다. 해골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한 해골은 길가는 노파를 유혹하고,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해골은 기사의 등을 창으로 찔러 죽음을 인도하는고, 예수의 복장을 한 해골은 앉은뱅이를 땅에서 일으켜 세운 다음, 죽음으로 인도하는 등 인간을 죽음으로 이끈다.

이렇듯 '춤추는 죽음'은 중세 후반기의 사상은 물론, 예술의 가장 지배적인 주제였다. '춤추는 죽음'은 한스 홀바인의 <춤추는 죽음> 연작으로 정점에 이른다. 특히 종교개혁을 통해 전 유럽에 확산됐다. 목판 인쇄의 발명과 한스 홀바인의 <춤추는 죽음> 연작은 북유럽 근대 캐리커처 탄생의 토대를 마련했다.

■ 한스 홀바인, '춤추는 죽음'

한스 홀바인은 1497년 독일 무역도시 아우그스부르크에 태어나 일찍이 북유럽과 이탈리아 화가들에 매료됐다. 특히 홀바인은 종교적 주제는 물론, 인물 초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스 홀바인 =춤추는 죽음 이미지 확대보기
한스 홀바인 =춤추는 죽음

홀바인은 인물화 작업 외에도 많은 목판화 작업을 했다. 특히 책의 표지나 내부 삽화를 판각했는데, 마틴 루터의 독일어판 성서를 위한 목판화 연작이 바로 <춤추는 죽음>이다. 이 연작은 총 41편으로 제작됐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정당성을 알리는 목적에서 만들어 졌으며, 연작 속 장면들은 일상생활 주변에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으며, 그 죽음이 어떻게 사람을 유혹하는지를 냉소적이면서도 희화적으로 보여준다.

내용 면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표현기법이 세밀한 선의 기교와 그로테스크한 인물의 행동과 표정이 잘 표현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인쇄술의 발전과 종교개혁

13세기경, 유럽은 이집트와 모로코를 통한 중국의 종이기술 전달로 본격적인 인쇄기술의 발전을 맞이했다.

당시 종교 논쟁이 격화되면서 반종교주의자와 종교개혁주의자들이 창조한 다양한 이미지는 유머의 차원을 넘어 폭력적이고 극단화 되어 갔다. 이러한 이미지의 소재는 로마 가톨릭 교황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주를 이뤘다.

루터의 사상은 독일어본 성서 인쇄물을 통해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종교 개혁과 관련된 도서들은 대부분 문맹이었던 일반 대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찬송가와 캐리커처를 삽입했다.

좌 =에르하르트 쇼엔  백파이프처럼 루터를 가지고 노는 악마   우 =지옥에 떨어지는 교황 이미지 확대보기
좌 =에르하르트 쇼엔 백파이프처럼 루터를 가지고 노는 악마 우 =지옥에 떨어지는 교황

대중들에게 전해진 캐리커처에는 교양 없는 주교, 탐욕스럽고 음란한 수도승, 일반 신도를 버리는 목자 등이 그려져 있었다. 철저한 종교개혁에 대한 선전과 기존 가톨릭에 대한 조롱이 주된 목적이었다. 루터파는 <지옥에 떨어지는 교황(1521년)>을 통해 교황도 이미 부패하여 결국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정치적 목적의 선전물을 그렸다.

반면, 반종교개혁자였던 에르하르트 쇼엔의 <백파이프처럼 루터를 가지고 노는 악마(1521년)>는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를 비하하는 대표적 그림이다. 악마에게 조종당하는 루터를 풍자함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의 도덕성과 신앙성을 의심하고 있다.

결국, 종교개혁 시기의 캐리커처는 철저하게 종교개혁자들과 반종교개혁자들의 선전물로 이용됐고, 그 목적은 자신들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근대 캐리커처의 내용과 표현기교는 서서히 성장했다. (下 계속)

◎ 참고자료
- 『캐리커처의 역사』. 저자 박창석
- 『예술과 환영』, 저자 곰브리치
- 『풍자예술의 역사』, 저자 샹플뢰리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저자 아놀드 하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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