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한승호 기자] 반도체 공장은 가동을 앞두고 있지만 진입도로와 용수시설은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대규모 투자를 끝낸 배터리·디스플레이 기업은 적자 때문에 세액공제를 당장 쓰지 못하는 문제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이런 첨단산업 현장의 ‘병목’을 풀기 위해 총 41건의 정책 개선 과제를 정부와 국회에 제안했다.
한경협은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바이오·로봇 등 국가첨단전략산업 분야 기업 의견을 수렴한 ‘국가첨단전략산업 정책 건의 과제’ 41건을 규제합리화위원회 등에 건의했다고 21일 밝혔다.
업종별로는 반도체가 21건으로 가장 많았고 바이오 9건, 배터리 4건, 로봇 3건 등의 순이었다. 전체 41건 가운데 20건은 법률 제·개정 없이 시행령·고시·행정계획 변경 등으로 검토·착수할 수 있고, 나머지 21건은 국회 입법이 필요한 과제로 분류됐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도로와 용수, 전력 등 기반시설 확충 지연 문제가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용인 반도체클러스터는 2027년 2월 첫 번째 팹(Y1) 클린룸 가동을 앞두고 있지만 주 진입도로인 국지도 57호선 원삼~마평 구간 개량사업의 국토부 고시가 오는 10월 이후로 예정돼 있다.
첫 번째 팹 가동과 두 번째 팹(Y2) 공사가 겹치면 자재·공사 차량이 동시에 몰릴 가능성이 큰 만큼 도로 확충을 서둘러야 한다는 게 한경협의 주장이다. 해당 사업이 지난 8월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한 만큼 ‘제6차 국도·국지도 건설계획’에 반영하고 고시 일정을 앞당겨 달라고 요청했다.
공업용수 공급 절차도 손질 대상으로 꼽혔다. 하루 3만5000톤 규모의 청주 하수처리수 재이용시설은 타당성 조사 15개월을 포함해 사업 착수부터 착공까지 총 42개월이 걸렸고, 622억원의 사업비 가운데 절반가량을 민간이 부담했다.
한경협은 첨단산업 기반시설에 별도 특례를 적용해 착공까지 걸리는 기간을 18개월 이내로 줄이고, 반도체특별법 시행령상 국비 지원 대상에 하수처리수 재이용시설을 명시해 줄 것을 건의했다.
전력 조달 문제도 포함됐다. 현재 기업이 발전사업자와 직접 전력구매계약을 맺을 수 있는 대상은 재생에너지로 제한돼 있어 원자력 등 다른 무탄소전력을 사용하는 기업은 글로벌 고객사의 전력 사용 증빙 요구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에 한경협은 탄소중립기본법을 개정해 무탄소전력 인증체계를 마련하고 전기사업법을 손질해 원전 등 무탄소전력도 단계적으로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설비용량 20MW를 초과하는 대수력 발전도 계통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기업과 직접 거래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을 요청했다.
배터리와 디스플레이 업계는 세액공제의 실효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현행 국가전략기술 투자세액공제는 납부할 법인세가 있어야 공제 혜택을 사용할 수 있어 대규모 선행투자로 적자가 이어지는 기업은 혜택을 즉시 활용하기 어렵다.
미공제 세액은 10년간 이월할 수 있지만 이 기간에도 흑자가 나지 않으면 소멸한다. 한경협은 미국 등의 사례처럼 사용하지 못한 세액공제를 현금으로 조기에 환급하는 직접환급 제도 등을 검토하고, 디스플레이 분야는 이월기간을 현행 10년에서 20년으로 늘려 달라고 건의했다.
바이오 분야에서는 초기 시험생산 문턱 완화가 주요 과제로 제시됐다. 세포치료제와 mRNA 백신 등을 소규모로 시험생산하는 위탁업체의 제조·품질관리기준(GMP) 적합성 평가 요건을 현행 3개 제조단위 생산 실적에서 1개로 줄여 연구개발 단계의 부담을 낮추자는 내용이다.
혁신 합성신약과 핵심 원료의약품의 국가전략기술 지정 확대, 정부가 추진 중인 국내생산세액공제 대상에 백신·바이오의약품을 포함하는 방안도 함께 건의했다. 국내 공장에서 생산한 수출용 의약품에도 국내 판매분과 동일한 세제 혜택을 적용해 달라는 요구도 담겼다.
로봇 분야에서는 피지컬 AI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와 컴퓨팅 인프라 개방이 핵심으로 꼽혔다. 휴머노이드 로봇 학습에 필요한 원본 영상·음성 데이터를 승인된 실증구역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정부 보유 GPU 등 AI 컴퓨팅 자원의 이용 대상을 대기업까지 넓혀 달라고 요청했다.
이 밖에도 자율주행차·전기차 등 미래차와 공기열 히트펌프를 국내생산세액공제 대상에 추가하고, 국산 AI 기반모델을 탑재한 가전제품의 보급과 공공수요를 지원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한경협은 정부가 법 개정 없이 추진할 수 있는 20건부터 우선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에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 9건을 포함해 입법이 필요한 21건에 대해 소관 상임위원회별 논의를 서둘러 달라고 요청했다.
권혁민 한경협 성장전략실장은 "국가첨단전략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업의 투자 판단과 실행을 가로막는 제도적 걸림돌을 신속히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부와 국회가 현장에서 바로 체감할 수 있는 과제부터 속도감 있게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승호 더파워 기자 hansh1975@thepower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