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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매를 들어야 내리는 가격, 그 '동참'의 민낯

이경호 기자

기사입력 : 2026-02-2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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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파워 이경호 기자] “지속적인 비용 상승.” 식품업계의 가격 인상 보도자료마다 약초처럼 쓰이는 이 문구는 그동안 전능했다. 원자재 가격, 물류비, 인건비가 올랐다는 설명은 늘 충분해 보였고, 소비자는 그 ‘불가피함’을 관성적으로 수용해 왔다.

하지만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놓은 설탕 담합 제재와 밀가루 업계 심의 결과는 이 익숙한 문장을 정면으로 되묻게 한다. 비용이 오를 때만큼이나, 비용이 내려갔을 때 가격이 어떻게 반응했느냐가 공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최근 설탕 시장에서 적발된 4,083억 원 규모의 담합 사건은 시장의 배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CJ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 등 3사는 원당 가격이 오를 때는 인상분을 즉각 반영하면서도, 내릴 때는 인하 폭을 줄이거나 시기를 늦추는 방식으로 이익을 극대화했다. 원가 하락의 혜택이 소비자에게 가는 길목을 기업들이 ‘밀실 합의’라는 바리케이드로 막아선 셈이다.

정부와 공정위의 서슬 퍼런 칼날이 매서워지자, 기업들은 기다렸다는 듯 가격 인하 카드를 꺼내 들고 있다. CJ제일제당이 설탕과 밀가루 가격을 최대 6% 인하했고, 삼양사와 대한제분 등도 줄줄이 동참했다. 완제품 업계의 반응은 더 기민하다.

지난 26일 파리바게뜨가 11종의 가격 인하를 발표하자, CJ푸드빌(뚜레쥬르) 역시 빵과 케이크 17종의 가격을 평균 8.2% 인하하며 맞불을 놨다. 원가 하락분이 비로소 완제품 가격으로 전이되는 '낙수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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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화려한 ‘인하 퍼레이드’를 바라보는 시선은 서늘하다. 기업들은 “어려운 경영 환경 속에서도 물가 안정에 동참한다”고 강조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과징금 폭탄과 고강도 압박에 밀린 ‘전략적 항복’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비용 상승이 가격 인상의 ‘자동 버튼’이었다면, 비용 하락에 따른 인하 역시 시장 기전 안에서 ‘자동’으로 이뤄졌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매를 들어야만 가격을 내리는 구조라면, 우리 시장의 가격 결정 시스템은 이미 심각하게 고장 난 상태다.

물가 안정에 동참한다는 말이 생색내기를 넘어 진심으로 읽히려면, 이제는 기업이 스스로의 '가격 시계'를 증명해야 한다. 오를 땐 빛의 속도로, 내릴 땐 거북이걸음이었던 그간의 관행을 끊어내는 일관성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정부의 칼날이 무서워 내놓은 '반짝 인하'는 유효기간이 짧다. 시장이 기업의 발표문을 다시 믿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비용이 내려갈 때도 인상 때만큼의 성실함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가격 결정은 기업의 권한이지만, 그 정당성은 공정한 틀 안에서만 확보된다. 지금 소비자에게 필요한 것은 기업의 생색내기용 ‘동참 선언’이 아니라, 비용이 내려갈 때도 정직하게 반응하는 시장의 상식이다. 이제라도 가격을 내리는 것은 다행이나, 왜 ‘이제야’ 가능했는지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 우선이다. 비용은 올릴 때만 정직해선 안 된다.

이경호 더파워 기자 lkh@th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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