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이경호 기자] 전기차 보조금이 탄소중립 지원 수단을 넘어 자국 자동차 산업과 공급망을 지키는 산업정책 수단으로 재편되고 있다.
전기차 시장은 계속 커지고 있지만 성장의 속도와 방향은 달라지고 있다. 글로벌 판매량은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으나 유럽과 북미에서는 보조금 축소와 폐지 이후 전환 흐름이 둔화됐다.
한때 전기차 보조금은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소비자 선택을 옮기기 위한 친환경 정책 수단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주요국이 보조금 제도를 다시 꺼내 들면서 정책의 성격은 점점 산업 보호와 공급망 재편으로 확대되고 있다.
글로벌 전기차 판매는 장기적으로 증가세다. 배터리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를 기준으로 전기차 판매량은 빠르게 늘었고, 연간 자동차 판매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졌다. 각국이 탄소배출이 많은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보조금, 세금 감면, 판매 의무 등 다양한 지원책을 운용한 결과다.
성장세를 가장 강하게 이끈 지역은 아시아다. 특히 중국은 아시아 전기차 판매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글로벌 전기차 산업의 중심축으로 부상했다. 중국의 전기차 생산과 판매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세계 전기차 시장의 가격 경쟁과 공급망 구조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기차 전환이 기후정책의 영역에만 머물 수 없게 된 배경이다.
반면 유럽과 북미에서는 전기차 보급 속도가 둔화됐다. 독일, 프랑스, 캐나다 등 주요국은 보조금 축소 또는 폐지 이후 전기차 판매 비중이 정체되는 흐름을 보였다. 전기차는 초기 구매가격, 충전 인프라, 주행거리 우려 등 소비자 부담이 여전히 남아 있어 정책 지원이 줄어들면 수요가 쉽게 위축될 수 있다. 보조금 중단 이후 일부 국가에서 신규 무공해 차량 등록이 감소한 점도 이 같은 취약성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주요국은 다시 보조금 제도를 도입하거나 지원 금액을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캐나다는 순수 전기차 구매 또는 장기 임대 시 최대 5000달러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보조금을 재도입했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에도 일정 조건을 두고 보조금을 지급하되, 생산국과 차량가격 조건을 함께 반영한다. 전기차 보급 확대와 동시에 자국 또는 자유무역협정 체결국 생산품을 우대하려는 구조다.
독일은 자녀 수와 소득 수준에 따라 보조금을 차등 지급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순수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 모두 일정 소득 이하 가구와 자녀 수 조건에 따라 지원 규모가 달라진다.
전기차 전환 정책이 고소득층 중심 혜택으로 흐르지 않도록 저소득층 부담을 줄이려는 장치다. 전기차 보조금이 단순한 구매 유도책을 넘어 분배 정책과 결합되는 모습이다.
영국은 탄소배출 점수를 기준으로 보조금을 차등 지급한다. 차량 조립 과정과 배터리 생산 과정의 배출 점수 등을 기준으로 밴드를 나누고, 차량 가격 조건도 둔다. 보조금이 소비자의 구매 부담을 낮추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 과정의 탄소배출까지 정책 기준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전기차가 운행 과정에서 배출가스를 줄이는 것뿐 아니라 생산 단계의 탄소발자국까지 평가 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은 노후차량을 폐차하거나 기존 차량을 매각한 뒤 전기차를 구매할 경우 보조금을 지급하는 구조를 운영하고 있다. 노후차량 폐차 시 전기차 가격의 일정 비율을 지원하고, 기존 차량 매각 시에도 일정 한도 내에서 보조금을 제공한다. 이는 전기차 수요를 촉진하는 동시에 내연기관차 교체를 유도하는 정책이다.
일본은 주행거리, 충전 인프라, 공급 안정성, 정비체계 등을 점수화해 보조금을 차등 지급한다. 차량 성능뿐 아니라 충전 인프라와 사후관리 체계까지 평가에 반영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친환경 강재 사용 시 추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도 포함돼 있어, 전기차 보조금이 완성차뿐 아니라 소재와 공급망 전반의 친환경 전환을 유도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프랑스는 에너지절약인증서 제도를 통해 구매자에게 지원금을 지급하고, 소득 기준과 생산·조립 지역, 배터리 사용 조건을 함께 반영한다. EU에서 생산·조립된 차량이나 배터리를 사용한 경우 추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이는 역내 생산 기반을 보호하고, 전기차 공급망을 유럽 안으로 묶어두려는 산업정책적 성격을 보여준다.
전기차 보조금의 성격이 바뀌는 가장 큰 이유는 중국 전기차 산업의 급성장이다. 중국의 생산량이 빠르게 늘면서 내수로 흡수되지 않는 물량이 저가로 수출되고 있고, 주요국은 이를 자국 자동차 산업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 전기차가 친환경 제품인 동시에 국가 제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산업이 되면서 보조금 정책도 방어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각국은 보조금 지급 조건을 점점 더 정교하게 설계하고 있다. 자국 생산품이나 자유무역협정 체결국 생산품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제한하거나, 자국 또는 역내에서 생산·조립된 차량에 추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탄소 배출이 많은 국가에서 생산된 차량에는 점수를 감점해 보조금을 줄이거나 제외하는 방식도 나타난다.
이는 전기차 보조금이 탄소중립 정책에서 산업정책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보조금의 목표가 소비자의 전기차 구매를 늘리는 데 있었다면, 이제는 어떤 국가에서 생산된 차량인지, 배터리와 핵심광물 공급망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생산 과정의 탄소배출이 어느 정도인지가 함께 고려된다. 보조금은 시장 수요를 만드는 동시에 공급망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정책 수단이 됐다.
전기차 산업을 둘러싼 경쟁은 앞으로 보조금의 규모보다 지급 조건에서 더 치열해질 가능성이 크다. 각국은 친환경 전환이라는 명분을 유지하면서도 자국 제조업과 일자리, 배터리·핵심광물 공급망을 보호하려 할 것이다. 전기차 보조금은 더 이상 단순한 소비자 지원금이 아니다.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과 공급망 질서를 재편하는 전략적 도구로 바뀌고 있다.
이경호 더파워 기자 lkh@thepower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