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전자 업종 뚜렷한 방향성 부재…2분기 실적 따라 주가 차별화
폴더블폰 수요 확대·AI 가속기 출하가 하반기 핵심 변수
기판·CCL 등 중소형 밸류체인 강세…실적 확인된 기업 중심 선별 장세
[더파워 이경호 기자] 전기전자 업종의 주가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던 시대에서 벗어나고 있다. 스마트폰과 가전 등 전통적인 세트 수요만으로 업종 전체를 설명하기 어려워진 가운데 폴더블폰과 인공지능(AI) 가속기, 고부가 기판·소재처럼 성장 동력을 확보한 기업으로 자금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2분기 실적 시즌을 거치면서 이 같은 차별화는 더욱 뚜렷해졌다. 업종 자체의 강한 상승 추세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도 예상보다 좋은 실적을 내거나 하반기 전망치를 높인 중소형 전기전자 기업은 가파른 주가 상승을 기록했다.
교보증권은 12일 전기전자 업종에 대해 “뚜렷한 추세가 부재한 가운데 중소형 기업의 호조세가 확인되고 있다”며 2분기 실적과 가이던스 상향 여부에 따라 종목별 선별 접근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일주일간 국내 전기전자 종목의 수익률을 보면 이런 흐름이 그대로 드러난다. 삼성전기와 LG전자, LG이노텍 등 대형주 가운데서도 주가 방향은 엇갈린 반면 기판과 부품 업체에서는 두 자릿수 상승 종목이 잇따랐다.
특히 코리아써키트는 주간 기준 21% 상승했고 심텍은 17.3% 뛰었다. 이수페타시스와 대덕전자, 티엘비 등도 강세를 나타냈다. 같은 전기전자 업종에 속해 있어도 실적과 성장 산업 노출도에 따라 수익률 격차가 크게 벌어진 셈이다.
심텍의 경우 2분기 호실적과 실적 가이던스 상향이 주가 상승의 직접적인 동력으로 작용했다. 단순히 업종 분위기를 따라가기보다 실적 발표를 통해 향후 성장성을 확인한 종목으로 매수세가 집중되고 있다는 의미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확인된다. 글로벌 기판 업체인 일본 이비덴은 한 주 동안 28% 상승했고, CCL·전기전자 소재 기업 가운데 ITEQ는 45.8%, Shengyi는 20.6%, TUC는 19.8% 올랐다.
결국 시장이 바라보는 기준은 ‘전기전자 업종이 좋아지는가’가 아니라 ‘어떤 기업이 다음 수요 증가를 실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가’로 옮겨가고 있다.
하반기 전기전자 산업의 첫 번째 변수는 폴더블폰이다.
폴더블 시장은 그동안 삼성전자가 사실상 대중화를 주도했지만 글로벌 스마트폰 업체들의 참여가 확대되면서 시장 자체가 한 단계 커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올해 글로벌 폴더블폰 판매량이 두 자릿수 증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향후 애플의 폴더블 제품 출시 가능성도 관련 부품 공급망에 새로운 성장 기회로 꼽힌다.
국내 시장에서는 이미 수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삼성전자의 신형 폴더블 제품 판매가 호조를 보이면서 관련 부품업체에 대한 기대가 커졌고, 일부 제품은 당초 계획보다 생산량을 늘리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폴더블 시장 확대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스마트폰 판매량이 늘어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폴더블 제품은 기존 바형 스마트폰보다 힌지와 디스플레이, 카메라, 기판 등에서 부품 구조가 복잡하고 고사양 제품 적용 비중도 높다.
세트업체가 폴더블 제품 판매를 늘리면 부품업체 입장에서는 출하량 증가와 함께 제품 믹스 개선까지 기대할 수 있다. 스마트폰 시장 전체가 크게 성장하지 않더라도 폴더블 제품 비중이 올라가면 관련 부품업체의 실적은 시장보다 빠르게 커질 수 있다는 의미다.
스마트폰 가격 상승도 변수다. 신제품 가격이 높아지면 소비 위축 우려가 커질 수 있지만 새로운 폼팩터와 기능을 제공하는 제품에는 소비자가 일정 수준의 프리미엄을 지불할 수 있다는 기대도 존재한다.
교보증권은 가격 인상에도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세트 제품의 수요에는 일정한 하방 지지가 나타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기존 스마트폰의 단순 사양 개선보다 폴더블처럼 사용 경험 자체를 바꾸는 제품이 판매 방어에 유리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두 번째 축은 AI다. AI 투자 수혜는 그동안 GPU와 HBM 등 반도체에 집중됐지만 데이터센터 투자 규모가 커질수록 기판과 CCL, 광통신 등 전기전자 부품으로 수혜 범위가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AI 가속기는 연산 성능을 높이기 위해 고사양 기판과 소재를 필요로 한다. 데이터 전송량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서버 기판의 층수와 사양이 높아지고, 고속 신호를 안정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CCL 역시 고부가 제품 사용량이 늘어나는 구조다.
최근 글로벌 CCL 업체들의 주가가 크게 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대만과 일본 업체들이 시장 기대를 웃도는 실적을 발표하면서 AI용 고사양 소재 수요가 실제 실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기대가 커졌다.
국내에서는 이수페타시스와 대덕전자, 심텍 등 기판 관련 업체가 대표적인 관심군으로 부상했다. 특히 AI 서버와 고성능 컴퓨팅 수요가 증가하면 범용 기판보다 높은 기술 수준을 요구하는 제품 비중이 늘어나 실적 개선 폭도 커질 수 있다.
하반기 선단 AI 가속기 출하 확대 역시 새로운 변곡점이 될 전망이다. 차세대 가속기 생산이 늘어나면 GPU 제조사뿐 아니라 기판과 소재, 통신 부품 업체까지 주문이 확산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다만 AI 공급망 확대가 모든 기업에 동일한 기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수주와 생산능력, 고객 인증 여부에 따라 업체별 실적 반영 속도에 상당한 차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공급망을 둘러싼 변수도 커지고 있다. 미국에서 중국산 광트랜시버 수입 규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데이터센터용 광통신 부품 공급망 재편 가능성까지 부각되고 있다.
규제가 현실화하면 단기적으로 공급망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지만 중국 이외 지역에서 생산능력을 갖춘 기업에는 신규 공급 기회가 생길 수 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단순 반도체 수요를 넘어 통신과 전력, 소재 공급망 전체를 재편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의미다.
최근 투자 주체의 움직임에서는 아직 업종 전체에 대한 강한 확신이 나타나지 않는다. 주요 전기전자 종목에서 외국인 순매도가 이어진 가운데 삼성전기 등 일부 대형주에서는 매도 규모가 상대적으로 컸다.
업종 전체를 한꺼번에 매수하기보다는 실적과 하반기 이벤트가 확인되는 종목을 골라 투자하는 전략이 강화되는 배경이다.
원자재 환경도 살펴봐야 한다. 구리 가격은 최근 6개월 기준 상승 흐름을 나타내고 있다. 전기전자 업체 입장에서는 원재료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전력망과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에 따른 구조적인 수요 증가를 보여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반면 원·달러 환율은 최근 고점에서 빠르게 내려온 모습이다. 해외 매출 비중이 높은 기업에는 환율 효과가 약해질 수 있어 하반기 실적에서는 실제 출하량과 제품 가격 상승이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
전기전자 산업의 하반기는 결국 ‘업종의 시간’보다 ‘기업의 시간’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스마트폰 판매량이나 가전 수요가 일제히 반등하는 전통적인 업황 회복보다 폴더블폰과 AI 가속기처럼 새로운 제품 사이클이 특정 공급망의 실적을 먼저 끌어올리는 형태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폴더블에서는 실제 생산량 확대와 글로벌 제조사의 신규 진입 여부, AI에서는 선단 가속기 출하와 고사양 기판·소재 수요가 핵심 지표가 될 전망이다.
교보증권도 하반기 전략으로 폴더블 수요와 선단 AI 가속기 출하 등 이벤트 수혜가 예상되는 기업에 대한 선별 접근이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전기전자 산업 전체의 강한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 것이 반드시 악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수요가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가 명확해질수록 실적을 만들어내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의 차이는 더욱 벌어질 수 있다.
2분기 실적 시즌에서 시작된 ‘옥석 가리기’가 폴더블과 AI라는 두 개의 성장축을 만나면서 하반기 전기전자 시장의 핵심 투자 구도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경호 더파워 기자 lkh@thepower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