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13일 ‘현장중심 기업투자·혁신 지원방안’ 1차 대책 발표
용인 반도체 2.5조·트리니티 팹 8000억·오창 바이오 5300억 등 가동 지원
산단 업종 규제 완화·로봇 안전기준 개편…AI데이터센터 설치 부담도 낮춰
[더파워 이경호 기자] 기업이 투자할 돈과 계획까지 마련했지만 각종 인허가와 입지·안전 규제에 막혀 대기 중인 4조원대 투자 프로젝트의 빗장이 풀린다.
정부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공장 증설 허가를 기존 건축허가와 분리하고, 구미·포항 국가산업단지에는 이차전지 리사이클링 기업의 입주를 허용하기로 했다.
오창 바이오 공장 증설을 위한 녹지 용도변경과 반도체 실증시설의 세 부담 완화까지 포함하면 이번에 직접 지원 대상에 오른 5개 프로젝트의 투자 규모는 약 4조2800억원에 달한다.
정부는 13일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주재로 열린 비상경제본부 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관계부처 합동으로 ‘현장중심 기업투자·혁신 지원방안(1차)’을 확정해 발표했다.
기업이 투자 계획을 세워놓고도 인허가와 입지·세제 규제 등에 막혀 대기하고 있는 반도체·이차전지·바이오·식품 분야 프로젝트를 우선 가동하고, 첨단산업 전반의 규제체계도 투자 친화적으로 바꾸는 것이 핵심이다.
정부는 우리 경제가 생산연령인구 감소와 자본의 성장 기여도 하락이라는 구조적 전환점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반도체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투자 회복세를 이어가는 동시에 기업 투자가 성장동력과 청년이 선호하는 일자리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방침이다. 2분기 설비투자는 전분기보다 0.2% 증가해 1분기 6.6%에 이어 증가세를 유지했다.
구윤철 부총리는 “기업의 투자와 혁신을 촉진하고 창업 열풍을 조성해 경제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며 “3대 메가프로젝트를 전속력으로 추진하는 한편 기업 투자가 성장동력 확충과 청년이 선호하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이번 대책의 방향을 ‘막힌 투자는 뚫고, 현장의 애로는 해소한다’고 잡은 이유다.
가장 큰 투자 규모가 걸린 곳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다. 현행 건축법은 ‘1대지 1허가’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다 추가 증설이 필요하면 기존 건축허가를 다시 변경해야 한다. 문제는 반도체 공장처럼 건설과 증설이 동시에 반복되는 현장에서는 허가 변경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증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는 증설을 추진할 때마다 건축허가 변경을 다시 신청하고 기존 증설분까지 재심사를 받아야 한다. 정부 자료에는 반도체 기업의 현장 의견으로 “신규 증설 또는 건설 과정에서 증설이 수시로 일어나는데, 증설 추진 시마다 건축허가 변경 절차를 다시 신청해야 해 증설이 지연된다”는 애로가 담겼다.
정부는 일정 면적 이상 산업단지에서는 추가 증설 건축물에 대해 기존 건축허가와 분리해 별도 신규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올해 하반기 건축법 개정을 추진한다. 이렇게 되면 기존 증설 공사를 진행하면서 추가 증설분은 독립적으로 심사받을 수 있게 된다. 정부는 이를 통해 2026~2027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서 약 2조5000억원 규모의 투자가 보다 신속하게 집행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차전지 산업에서는 ‘제조업은 되고 리사이클링은 안 되는’ 산업단지 업종 규제를 손본다.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인 구미·포항 국가산단에는 현재 이차전지 제조업은 입주할 수 있지만 폐배터리에서 리튬·니켈·코발트 등을 회수하는 재자원화 기업은 폐기물 연관 업종으로 분류돼 들어갈 수 없다.
정부는 올해 1월 마련된 핵심광물 재자원화산업 특수분류를 활용해 재자원화 리튬·니켈·코발트·망간·흑연의 중간·최종 소재 제조업을 산단 입주 대상에 추가한다. 국토교통부의 산업단지계획과 산업통상부의 관리기본계획을 올해 하반기부터 개정해 약 1000억원 규모의 신규 투자를 지원할 계획이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이 실제 양산 환경과 비슷한 조건에서 제품을 시험할 수 있는 ‘트리니티 팹’에도 세제 문턱을 낮춘다. 트리니티 팹은 12인치 웨이퍼 기반의 3300㎡급 클린룸과 반도체 5대 공정 실증공간 등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로 총 투자 규모는 약 8000억원이다.
현재는 반도체 기업이 실증 지원법인에 재산이나 시설 이용권, 인력 등을 출연하면 법인이 증여세를 부담할 수 있다.
정부는 국비가 사업비의 50%를 지원하고 공공과 민간이 공동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상생협력 사업이라는 점을 고려해 일정 요건을 충족한 비영리 테스트베드 운영법인이 증여받은 재산이나 이익에 대해 2027년부터 2031년까지 증여세를 비과세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올해 하반기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을 추진한다.
오창과학산업단지에서는 5300억원 규모의 바이오 공장 증설을 막고 있던 ‘땅의 용도’를 바꾼다. 해당 기업은 기존 제조시설과 물리적으로 연결된 공장을 추가로 지어야 하지만 산단 내 유휴 산업용지가 부족해 증설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와 청주시는 기존 공장에 붙어 있는 청주시 소유 녹지를 산업용지로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오창과학산단의 현재 녹지율은 약 18%로, 일부를 산업용지로 바꾸더라도 법정 녹지율 기준인 10~13%를 충족한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산단계획 변경과 부지 매각은 올해 하반기 추진된다.
전북 익산 국가식품클러스터에서는 놀고 있는 음료제조업 부지를 식·음료제조업 부지로 넓혀 약 3500억원의 기업 투자를 유도한다. 지난해 말 기준 식음료제조업 부지 분양률은 90.3%였지만 음료제조업 전용 부지는 22.2%에 불과했다.
정부는 음료제조업 용지 가운데 9만443㎡를 식료품·음료제조업이 함께 들어올 수 있는 부지로 변경한다. 식품기업들이 대규모 생산시설을 지을 수 있는 넓은 필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입주 업종 칸막이를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대책은 이미 정해진 5개 투자 프로젝트만 푸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정부는 반도체와 로봇, AI데이터센터 등 첨단산업 전반에 남아 있는 규제를 한꺼번에 손질해 앞으로 발생할 투자 지연을 줄이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산업용 로봇 규제가 대표적이다. 현행 산업안전보건 규정은 고정형 로봇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근로자와 같은 공간에서 움직이는 협동로봇이나 이동형 로봇에는 적용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로봇 주변에는 1.8m 이상의 울타리를 설치해야 하는데, 펜스 없이 사람과 함께 작업하는 협동로봇은 이 기준 때문에 현장 도입에 애로가 있었다.
정부는 협동로봇과 이동형 로봇 등이 KS·ISO 안전기준에 맞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상세 가이드라인을 2027년 상반기 마련하고, 다양한 신유형 로봇을 포괄하도록 ‘산업용 로봇’의 법적 정의도 정비한다.
반도체·이차전지·디스플레이·바이오·로봇·방산 등 6대 첨단전략산업의 공장 화재안전 규제도 달라진다. 정부는 일반 건축물과 같은 획일적 기준 대신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피난시간과 화재확산 시간을 분석하는 ‘성능기반설계’를 도입한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피난 소요시간이 화재 확산시간보다 짧다는 점을 입증할 경우 산업 특성을 반영한 대안 설계를 허용하는 방식이다. 자동화·무인화 공장의 직통계단 설치기준도 함께 정비해 현재 불명확한 ‘무인화 공장’의 정의와 인정 기준을 구체화한다.
반도체 공장의 도시가스 검사도 절반 수준으로 단축한다. 현재 반도체 팹은 유해가스 저감장치 등을 증설해 월간 도시가스 사용량이 500㎥ 이상 증가할 때마다 완성검사를 받아야 한다. 반도체 팹에서는 연간 약 1800건의 증설이 발생해 검사 대기 때문에 장비 가동이 늦어지는 사례가 있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정부는 기술검토 기간을 5일에서 3일로, 완성검사를 7일에서 3일로 줄여 전체 절차를 12일에서 6일로 단축한다. 안전장치와 시공능력을 갖춘 경우 내압·기밀시험 등 일부 검사항목은 시공자의 자체 시험성적서로 대체할 수 있도록 오는 10월 관련 KGS Code도 개정한다.
AI데이터센터에는 일반 건물과 똑같이 적용되던 주차장·승강기·미술품 설치 부담을 낮춘다. AI데이터센터는 상주 인력이 많지 않지만 현재는 시설면적과 연면적을 기준으로 일반 건축물과 동일한 설치의무를 적용받고 있다.
정부는 주차장과 승강기, 미술품 설치기준을 계산할 때 데이터센터 전산실 면적 등을 제외하는 방향으로 특례를 마련한다. 지난 6월 제정된 AI데이터센터 특별법을 바탕으로 2027년 3월까지 관련 시행령을 마련할 계획이다.
산업단지 자체의 ‘업종 칸막이’도 완화된다. 신산업과 RE100 기업 등의 입주 수요가 있는 경우 법적으로 금지된 업종을 제외한 모든 업종이 들어갈 수 있는 ‘제한업종 계획구역’의 지정한도를 현재 산업용지 면적의 30%에서 최대 50%까지 확대한다.
기존 산업단지를 대상으로 하는 업종특례지구도 토지소유자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지정할 수 있지만 앞으로는 과반수 동의로 요건을 완화한다. 초기 산단 조성 당시 정해 놓은 업종 계획 때문에 경기 변화와 신산업 수요를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국가적 중요도가 높은 산업단지에는 개발 밀도를 대폭 높일 수 있는 ‘도시혁신구역’도 도입한다. 현재 도시혁신구역은 시·도지사가 지정하지만 정부는 기업형 첨단도시 등 국가 정책상 중요도가 큰 국가산단의 경우 국토교통부 장관도 지정할 수 있도록 산업입지법을 개정한다.
도시혁신구역에서는 건축물 용도나 건폐율·용적률·높이 등의 규제를 지역 여건에 따라 탄력적으로 정할 수 있다. 정부는 이론적으로 법정 용적률 상한인 1500%를 넘어서는 고밀·복합개발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비수도권의 대규모 기업 유치를 위한 기회발전특구도 넓어진다. 현재 지정 상한은 광역시 150만평, 도 지역 200만평이지만 일부 지역은 이미 한도를 모두 소진해 신규 투자를 받을 공간이 부족한 상황이다.
정부는 비수도권에 한해 예시적으로 광역시는 200만평, 도는 300만평까지 지정할 수 있도록 상한 확대를 추진한다.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조선수리, 해상풍력, 데이터센터, 대규모 물류단지 등 넓은 부지를 필요로 하는 신규 투자를 겨냥한 조치다. 관련 지침 개정은 2027년 상반기를 목표로 한다.
이번 대책은 정부가 추진하는 기업투자 규제 개선의 첫 번째 묶음이다. 정부는 반도체·이차전지 등 첨단산업의 현장대기 프로젝트와 규제·입지 문제를 1차로 해결한 뒤 초혁신경제 프로젝트와 녹색산업 등을 중심으로 3분기 중 2차 투자대책을 추가로 발표할 계획이다.
구 부총리는 “기업 수요가 있으나 투자가 지연되고 있는 현장대기 프로젝트의 신속한 가동을 지원하겠다”며 구미·포항 이차전지 재자원화 투자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오창 바이오 증설을 주요 사례로 제시했다. 이어 “첨단·신산업을 중심으로 투자친화적인 제도기반도 구축하겠다”고 강조했다.
이경호 더파워 기자 lkh@thepower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