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200 수출 허용에도 중국 기업 인도 못 받아…수입통제로 주도권 역전
화웨이, DUV·3차원 적층·CANN 결합…전통 제조업과 피지컬 AI까지 확장
이미지 확대보기중국 휴머노이드 로봇 1위 기업 유니트리(Unitree)의 AI 로봇이 율동을 선보이고 있다./연합뉴스
[더파워 이경호 기자] 미국이 첨단 반도체 공급을 차단해 중국의 인공지능 성장을 늦추려 했지만, 중국은 칩 한 개의 성능 대신 반도체·소프트웨어·공장 전체를 하나로 묶는 독자 생태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미·중 경쟁의 전장도 관세와 개별 기술 통제에서 누가 세계 공장의 작동 방식과 인공지능 표준을 결정할 것인지로 옮겨가고 있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미·중 경쟁 2.0, 중국의 AI·공급망 전략 변화와 우리의 대응’ 보고서에서 미·중 패권 경쟁이 통상 압박의 첫 번째 국면을 지나 글로벌 AI 생태계와 산업 아키텍처의 주도권을 다투는 장기 경쟁으로 전환됐다고 분석했다.
반도체와 AI 모델의 성능을 겨루는 데 그치지 않고 제조 현장의 데이터와 제어 방식, 작업 절차까지 경쟁 대상이 됐다는 진단이다.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은 지난 7월 17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인공지능대회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의 독자적 AI 생태계 확장과 국제 협력을 동시에 강조했고, 딥시크 등 오픈소스 모델을 앞세워 글로벌 표준 경쟁에 뛰어들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중국이 주도하고 29개국이 참여한 세계인공지능협력기구도 출범했다.
중국의 전략은 미국이 주도해온 AI 규칙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수준을 벗어났다. 자체 모델을 해외에 개방하고 다자 협력체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기술뿐 아니라 안전과 거버넌스 규범까지 중국 중심으로 설계하겠다는 것이다. 산업연구원은 이를 두고 경쟁 단위가 특정 반도체나 장비의 접근권에서 AI 생태계 전체와 산업 표준으로 확장됐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통제는 예상과 다른 결과도 낳았다. 미국은 중국 기업에 첨단 AI 칩을 공급하지 못하도록 통제했지만, 중국은 이를 국산화의 명분으로 삼았다. 미국 정부가 2025년 12월 엔비디아의 H200 중국 판매를 허용했음에도 중국 정부가 자국산 AI 칩 육성을 위해 수입을 제한하면서 올해 5월 기준 주요 중국 기술기업은 H200을 인도받지 못한 것으로 보고서는 분석했다.
엔비디아의 중국시장 점유율도 과거 95%에서 사실상 0에 가까운 수준으로 떨어진 것으로 평가됐다. 미국이 수출 허용 여부를 결정하던 구조가 중국이 어떤 칩을 언제 수입할 것인지 선택하는 구조로 바뀐 셈이다. 세계 최대 반도체 수요시장인 중국이 구매력을 공급망 협상 카드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중국은 최첨단 장비 확보에만 매달리지 않고 기술 경로 자체를 우회하고 있다. 화웨이는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구형 심자외선 장비와 3차원 적층, 첨단 패키징을 결합해 시스템 성능을 높이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미세공정에서 뒤처지더라도 여러 칩을 연결하고 신호 전달 경로를 최적화해 시스템 전체 성능으로 격차를 줄이겠다는 구상이다.
소프트웨어도 별도로 구축하고 있다. 화웨이의 CANN은 엔비디아의 CUDA에 대응하는 AI 연산 플랫폼으로, 화웨이의 어센드 가속기와 AI 모델을 연결한다. 중국산 AI 모델과 소프트웨어, 칩이 서로의 성능과 수요를 키우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미국의 통제가 오히려 독자 생태계의 결속을 높였다는 게 보고서의 분석이다.
반도체 공급망의 밑단도 빠르게 채워지고 있다. 중국은 첨단 노광장비를 제외한 중저위 공정 장비와 소재의 국산화를 확대하고 있으며, 창신메모리와 양쯔메모리를 앞세워 범용 D램과 낸드 생산능력을 늘리고 있다. 한국과 미국 기업들이 고대역폭메모리와 최첨단 공정에 자원을 집중하는 사이 중국은 가격 경쟁력이 높은 범용 제품의 대량 공급망을 구축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 구조가 굳어지면 중국은 범용 반도체의 공급량과 가격을 조절할 수 있는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다. 최첨단 제품에서는 뒤처지더라도 전자제품과 자동차, 산업기기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범용 반도체 시장을 장악해 글로벌 제조업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AI 전략은 반도체에 머물지 않는다. 중국 공업정보화부와 국가데이터국은 철강과 비철금속, 석유화학, 자동차, 선박, 항공우주, 전자부품, 디스플레이 등 20개 제조 분야에 AI를 적용하는 ‘모델·데이터 공진’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업종별 데이터와 전용 모델을 만들고, 생산 현장에 특화된 AI 에이전트와 평가체계까지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중국의 생산·제조 분야 AI 모델 활용 비중은 2024년 19.9%에서 2025년 25.9%로 높아진 것으로 추산됐다. AI 적용 무대가 인터넷과 사무 업무에서 고로 운전, 화학 공정, 설계, 품질검사 등 실제 제조 현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가장 치열한 전장은 피지컬 AI다. 올해 7월 기준 중국의 휴머노이드 로봇 제조업체는 140곳을 넘어섰고 제품 종류도 약 400개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서는 집계했다. 세계 휴머노이드 로봇 제품의 절반 이상이 중국에서 나온다는 분석도 제시됐다.
다만 중국이 노리는 것은 로봇 판매량만이 아니다. 미국이 학습 알고리즘과 범용 모델의 성능에 집중한다면 중국은 지능형 제어와 시스템 통합, 생산 효율 개선처럼 실제 공장에서 로봇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제품보다 공정 운영방식을 먼저 장악하려는 전략이다.
중국은 충분히 작동하는 AI와 로봇을 제조·물류 현장에 대규모로 투입하고, 같은 작업 절차를 반복해 ‘작업표준’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렇게 검증된 공장 운영체계가 로봇과 설비, 소프트웨어를 묶은 패키지로 신흥국에 수출되면 공식 국제표준으로 채택되지 않더라도 세계 산업현장의 사실상 표준이 될 수 있다.
한번 도입된 제조 시스템은 교체 비용이 크다. 로봇의 행동 방식과 설비 업데이트 권한, 생산 데이터까지 특정 국가의 기술체계에 종속될 가능성도 있다. 미·중 경쟁의 두 번째 국면은 결국 누가 더 뛰어난 로봇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누가 세계 공장의 작업 방식과 운영 권한을 쥐느냐의 경쟁으로 번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