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운용사 위탁규모 2012년 1억달러→지난해 32억1000만달러 확대
민간 해외주식 투자 급증에 선진국 주식 패시브 위탁 비중 축소
‘미국 종합채권’→28개국·3만종목 ‘글로벌 종합채권’ 전략으로 전환
향후 주식 부문 AI 기반 퀀트 등 고난도 액티브 운용 지원도 검토
[더파워 이경호 기자] 한국은행이 국내 자산운용사에 맡기는 외화자산 위탁운용 포트폴리오를 재편한다. 민간의 해외주식 투자 기반이 크게 성장한 만큼 선진국 주식 패시브 위탁 비중은 줄이고, 운용 난도가 높은 글로벌 채권 운용을 확대해 국내 운용사의 액티브 운용 역량을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정책의 무게중심을 옮긴다.
한국은행은 16일 국내 자산운용사를 대상으로 한 외화자산 위탁운용 정책을 기존 ‘양적 기반 조성’에서 ‘질적 역량 강화’ 중심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정책적 지원 필요성이 줄어든 해외주식 패시브 위탁은 축소하고 해외채권 위탁을 확대하는 한편 기존 미국 종합채권 전략을 ‘글로벌 종합채권’ 전략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한은은 외환보유액을 운용하면서 안전성과 유동성, 수익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동시에 국내 금융기관의 운용 역량을 높이고 금융산업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 자산운용사에도 외화자산 일부를 맡겨왔다.
국내 운용사 위탁은 2012년 중국 주식으로 시작됐다. 이후 2019년 선진국 주식, 2022년 미국 종합채권으로 위탁 영역을 넓히면서 국내 운용사들이 글로벌 투자 경험을 쌓도록 지원했다.
위탁 규모도 빠르게 커졌다. 2012년 1억달러였던 국내 운용사 위탁원금은 2019년 7억4000만달러, 2022년 30억4000만달러를 거쳐 지난해 말 32억1000만달러로 확대됐다.
올해 7월 말에도 위탁원금은 32억1000만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위탁 운용사는 2012년 2개사에서 2015년 3개사, 2021년 4개사, 2022년 이후 5개사로 늘었다.
현재 국내 운용사에 맡긴 자산은 중국·선진국 주식과 미국 종합채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중국 주식 위탁원금은 5억9000만달러로 3개 운용사가 맡고 있고, 선진국 주식은 19억2000만달러를 4개사가 운용한다. 미국 종합채권 위탁 규모는 7억달러로 3개사가 참여하고 있다.
한은이 14년간 유지해온 위탁정책 방향을 바꾸기로 한 것은 국내 자산운용업계의 해외투자 기반이 과거보다 크게 성장했다는 판단에서다.
한은은 장기간 안정적인 자금을 지원하면서 국내 운용사들이 해외투자 전담 조직을 확대하고 투자 의사결정 과정과 리서치, 리스크 관리, 결제 오퍼레이션 등 핵심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2022년 이후 외환보유액이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국내 운용사에 대한 위탁 규모를 유지하면서 해외투자 운용 인프라 구축을 지원했다.
민간 해외주식 투자시장이 빠르게 성장한 점도 정책 전환의 배경이다. 국내 해외투자 주식펀드 순자산은 2020년 27조7000억원에서 지난해 110조8000억원으로 약 4배 늘었고 올해 6월에는 163조원까지 확대됐다.
공모 해외주식 펀드만 보면 같은 기간 20조1000억원에서 150조5000억원으로 증가했다. 특히 상장지수펀드(ETF)는 2020년 1조6000억원에서 올해 6월 126조3000억원으로 80배 가까이 불어났다.
반면 해외채권 펀드 시장의 성장 속도는 상대적으로 더뎠다. 국내 해외투자 채권펀드 순자산은 2020년 8조원에서 지난해 12조4000억원으로 늘었다가 올해 6월 11조1000억원으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해외주식 펀드와의 격차는 크게 벌어졌다.
공모 해외채권 펀드는 올해 6월 6조5000억원, 사모는 4조6000억원이었다. 채권 ETF 순자산도 3조7000억원으로 해외주식 ETF와 큰 차이를 보였다.
한은은 해외주식 분야의 경우 민간 시장이 자체적으로 성장하면서 초기 정책 목표였던 ‘양적 기반 조성’이 상당 부분 달성됐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위탁 규모를 계속 키우는 방식보다 국내 운용사가 해외 운용사와 경쟁할 수 있는 고난도 운용능력을 갖추도록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우선 현재 선진국 주식 위탁 가운데 실질적으로 벤치마크를 추종하는 패시브 방식에 가까운 자금의 비중을 줄인다. 패시브 운용은 시장지수를 따라가는 방식인 만큼 고도의 리서치나 투자 판단, 위험관리 역량을 축적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한은의 판단이다.
줄어든 주식 위탁자금은 채권 쪽으로 재배분한다. 다만 이번 조정은 한은 외화자산 전체의 자산배분 체계 안에서 이뤄지는 만큼 외환보유액 전체의 주식·채권 비중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국내 운용사에 맡기는 자산 내에서 위탁 구성을 바꾸는 방식이다.
채권 운용 방식도 한 단계 복잡해진다. 한은은 2022년 해외 채권펀드를 국내 운용사에 처음 맡길 당시 투자지역을 미국으로 제한하고 자산유동화증권(MBS) 등을 제외한 ‘미국 종합채권’ 전략을 도입했다. 당시에는 국내 운용사의 해외채권 운용 경험을 고려해 비교적 운용 범위가 제한된 전략부터 시작했다.
앞으로는 이를 ‘글로벌 종합채권(Global Aggregate)’ 전략으로 전환한다. 미국 종합채권이 1개 국가의 약 1만개 종목을 투자 대상으로 삼는다면 글로벌 종합채권은 약 28개국, 약 3만개 종목을 다룬다. 선진국 주식 전략은 약 23개국, 1200~1300개 종목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투자대상 숫자만 놓고 봐도 글로벌 종합채권 전략의 운용 범위가 훨씬 넓다.
투자 난이도 역시 높아진다. 글로벌 종합채권은 여러 국가와 통화권의 채권을 동시에 운용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금리 전망만으로 운용하기 어렵다. 주요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차이와 글로벌 경기 사이클, 환율 변동 등 다양한 거시경제 변수를 분석해 투자전략을 짜야 한다.
한은은 수만개 투자대상 종목과 복잡한 거시경제 변수를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만큼 높은 수준의 거시경제 분석과 정교한 리스크 관리체계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국내 증권사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글로벌 종합채권 전략이 확대되면 국내 운용사가 해외채권 거래를 늘리게 되고, 이에 따라 국내 증권사의 해외채권 거래 중개 역량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한은의 판단이다.
다만 현재 글로벌 종합채권 거래에서 국내 증권사의 활용 가능성은 매우 제한적인 수준이다. 미국 종합채권 역시 국내 증권사 활용이 제한적이며, 상대적으로 선진국 주식은 국내 증권사를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해외 운용사와 국내 운용사의 성과를 직접 비교할 수 있다는 점도 이번 개편의 특징이다.
글로벌 종합채권을 운용하는 해외 운용사와 같은 전략으로 국내 운용사의 성과를 비교하면 어떤 분야의 역량이 부족한지 확인하기 쉬워지고, 향후 지원 방향도 보다 구체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은은 국내 운용사 위탁정책을 단계적으로 고도화한다는 계획이다. 2012년부터 올해까지를 운용이 상대적으로 쉬운 전략을 중심으로 위탁 규모를 확대하며 ‘양적 기반’을 만드는 1단계로 보고, 올해부터는 고난도 전략 지원을 통해 질적 역량을 높이는 2단계로 전환한다.
이후 국내 운용사가 본격적인 액티브 운용을 통해 해외 운용사와 직접 경쟁하고 장기적으로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하도록 유도한다는 구상이다.
지원 영역도 채권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한은은 이번 글로벌 종합채권 전략 확대 이후에도 주식 부문에서 인공지능(AI) 기반 퀀트 전략 등 국내 운용사의 역량 강화를 위해 정책적 지원이 필요한 분야가 확인되면 추가 지원을 검토할 방침이다.
한은은 “국내 운용사들이 액티브 운용을 통해 안정적인 초과수익을 창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 운용사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유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경호 더파워 기자 lkh@thepower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