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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글 특집 비평 : 금보성비엔날레] 한글의 선에는 한국인의 미감이 있는가

최성민 기자

기사입력 : 2026-08-26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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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일본 비평가의 시선으로 본 금보성 회화, 무너지지 않는 문자의 힘

한글을 처음 바라보는 일본인의 눈에는 낯선 긴장이 있다.

한자처럼 하나의 글자 안에 의미가 응축되어 있지도 않고, 일본 가나처럼 곡선의 흐름을 중심으로 읽히지도 않는다. 직선과 원 , 꺾임과 교차가 제한된 공간 안에서 놀라울 만큼 명확한 질서를 만든다.

그러나 이 단순함을 곧바로 기하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글을 절반만 보는 일이다.

한글의 기본 자음은 발음기관의 형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기본 모음에는 하늘·땅·사람이라는 천지인의 원리가 반영되어 있다. 또한 기본형에 획을 더하고 결합함으로써 문자체계가 확장된다. (국립한글박물관⁠ )

따라서 한글의 선은 처음부터 장식적 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리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의 선이었다.
금보성의 회화가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단단한 문자체계에 균열을 가하면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는 한글을 아름답게 쓰지 않는다.
오히려 한글이 얼마나 변형될 수 있는지를 시험한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과한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곳에서 금보성 회화의 깊이가 시작된다.

-일본의 문자는 흐르고, 금보성의 한글은 버틴다

일본인의 시선에서 금보성의 한글을 바라볼 때 가장 먼저 감지되는 것은 선의 성격이다.

일본 서예에서 선은 몸의 운동과 밀접하다.

붓이 종이에 닿고, 움직이고, 멈추고, 다시 떠나는 과정에서 시간과 호흡이 기록된다. 특히 일본 미학의 ‘間(마)’는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라 획과 획, 움직임과 멈춤 사이를 활성화하는 적극적인 간격으로 이해될 수 있다. (Yohaku⁠ )

그러나 금보성의 선은 다른 긴장을 갖는다.
흐르기보다 세워진다.
이어지기보다 꺾인다.
사라지기보다 버틴다.
특히 ㄱ·ㄴ·ㅁ과 같은 구조는 붓의 흔적이라기보다 작은 건축의 골격처럼 보인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금보성에게 선은 감정을 기록하는 흔적에 앞서 화면을 세우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한글은 서예에서 멀어지는 순간 오히려 새로운 힘을 얻는다.
쓰는 선에서 세우는 선으로. 읽히는 문자에서 버티는 구조로. 금보성의 한글은 그렇게 이동한다.

-단단하다는 것은 깨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금보성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단함’이라는 말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보통 단단한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에서 진정으로 강한 구조는 변형을 거부하는 구조가 아니다.
변형된 뒤에도 자기 근원을 잃지 않는 구조다.
금보성은 자음을 확대한다.
잘라낸다. 회전시킨다. 겹친다. 색으로 분리한다. 때로는 표면에 균열을 발생시킨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관객은 그것이 완전히 임의적인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한다.
어딘가에 문자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금보성이 한글을 해체하는 행위는 한글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글에서 어디까지 제거해도 한글의 정신적 골격이 남는지를 확인하는 행위에 가깝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해체는 파괴의 반대편에 있다.
해체는 구조를 검증하는 방법이다.

-균열은 약함이 아니라 내부를 보여주는 창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금보성 회화의 크랙은 새롭게 읽을 수 있다.
표면의 균열을 단순한 재료적 효과로 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기법에 머문다.
그러나 한글의 구조와 연결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균열은 완전한 표면에 틈을 만든다.
그리고 그 틈을 통해 표면 아래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일본 미학에는 완전한 표면보다 시간과 불완전성을 품은 대상에서 미적 깊이를 발견하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금보성의 균열을 곧바로 일본의 와비사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일본적 불완전성이 시간과 소멸을 받아들이는 감각이라면, 금보성의 균열은 오히려 무엇이 끝까지 남는가를 묻는 적극적인 행위에 가깝다.
깨졌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깨뜨렸는데도 남아 있기 때문에 강한 것이다.
이 차이가 금보성의 크랙을 장식적 효과에서 미학적 질문으로 이동시킨다.

-‘間’과 한글의 차이는 비어 있는 곳에서 드러난다

일본미술의 여백을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間’이다.

間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다. 두 존재 사이에 놓여 있으면서 양쪽의 존재감을 강화하는 적극적인 간격이다. 일본의 서예에서도 획뿐 아니라 획 사이의 공간과 호흡이 작품의 리듬을 결정한다. (Yohaku⁠ )

금보성의 화면에도 ‘사이’가 있다.
그러나 그 사이는 일본의 間과 동일하지 않다.
금보성의 공간은 반드시 고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색과 색이 서로 밀어낸다.
선은 다른 선의 진입을 막기도 한다.
거대한 색면은 주변의 공간을 압박한다.
즉 그의 빈 공간에는 침묵보다 힘의 압력이 존재한다.

그래서 금보성의 여백은 비어 있음의 미학이라기보다 관계의 밀도를 조절하는 공간에 가깝다.
어떤 곳은 숨을 쉬게 하고, 어떤 곳은 숨을 막히게 한다.
이 차이가 화면에 긴장을 만든다.

-한국의 미감은 부드러움에만 있지 않다

외부의 시선은 한국미를 종종 자연스러움, 소박함, 여백, 절제와 연결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국의 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한국에는 단청이 있고 색동이 있다.
농악의 장단이 있고 탈춤의 과장이 있다.
판소리의 긴 호흡 뒤에는 폭발적인 소리가 있다.
고요와 격정이 함께 존재한다.
금보성의 화면에서도 이 이중성이 발견된다.
한글의 골격은 엄격한데 색은 대담하다.
구조는 절제되어 있는데 규모는 거대하다.
직선은 냉정하지만 화면 전체는 뜨겁다.
이 모순을 제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바로 그 모순에서 금보성 회화의 한국적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적 미감은 언제나 부드러운 조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힘을 한 공간 안에서 견디게 하는 데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보성의 색은 선을 장식하지 않는다

금보성의 작품에서 색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색을 한국 전통의 오방색이나 색동과 직접 연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색의 역할이다.
그의 색은 선 뒤에 칠해진 배경이 아니다.
때로는 색 자체가 선을 밀어내고, 하나의 면이 다른 면을 침범하며, 서로 다른 색의 경계가 새로운 획처럼 작동한다.

따라서 금보성의 회화에서는 선과 색의 위계가 무너진다.
선이 색을 만들기도 하고,
색의 경계가 다시 선을 만든다.
여기에서 한글은 더 이상 검은 글씨와 흰 종이라는 문자적 조건에 머물지 않는다.
문자의 골격이 색채의 구조로 번역되는 것이다.
이 번역이 성공할 때 한글은 소재가 아니라 회화를 발생시키는 원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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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가장 중요한 것은 ‘읽을 수 없음’이다

금보성 회화의 역설은 한글을 사용하는데도 한글을 쉽게 읽을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일 수 있다.
한국인은 한글을 보는 순간 읽으려 한다.
문자는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형태보다 의미가 먼저 들어온다.

금보성은 그 자동적인 독해를 방해한다.
읽으려는 순간 획이 끊어지고,
글자를 찾으려 하면 색면이 나타나며,
뜻을 확인하려는 순간 거대한 구조가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밀어낸다.
그때 관객은 처음으로 한글을 읽지 않고 바라보게 된다.
이것은 작은 변화가 아니다.

문자의 기능을 중지시키면서 문자 자체를 다시 발견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읽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한글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한글을 다시 보게 만드는 방법이다.
금보성 회화의 깊이는 바로 이 역설에 있다.

-한글은 금보성에게 재료가 아니라 저항이다

많은 작가에게 소재는 표현을 돕는다.
그러나 금보성에게 한글은 오히려 쉽게 다룰 수 없는 저항체에 가깝다.
한글은 이미 완성된 문자이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명확한 기능과 규칙을 가지고 있다.
그처럼 강한 체계를 회화로 옮긴다는 것은 자유로운 백지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어려울 수 있다.

너무 많이 바꾸면 한글이 사라진다.
너무 적게 바꾸면 디자인에 머문다.
따라서 금보성은 늘 위험한 경계 위에서 작업한다.
문자를 유지하면서 문자를 벗어나야 한다.
한글이면서 동시에 한글이 아니어야 한다.
바로 이 모순이 그의 작업을 지속시키는 동력이다.

금보성은 한글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글이라는 강한 구조와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 싸움이 오랜 시간 지속될수록 작품에는 작가 개인의 습관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론이 축적된다.

-거대해진 한글 앞에서 인간은 다시 작아진다

금보성비엔날레에서 중요한 것은 한글의 구조만이 아니다.
크기다.
종이 위에서 손가락만 하던 획이 인간의 몸을 넘어서는 규모로 확대되는 순간 문자와 관객의 관계는 완전히 바뀐다.
작은 글자는 인간이 내려다본다.
거대한 글자는 인간이 올려다본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우리가 평생 사용했던 문자가 어느 순간 우리보다 커지는 것이다.
그때 관객은 문자를 지배하는 사용자의 위치에서 내려온다.
더 이상 글자를 읽고 지나갈 수 없다.
뒤로 물러서야 하고, 고개를 움직여야 하며, 몸으로 거리를 측정해야 한다.
문자가 공간이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금보성의 대형 한글은 단순히 작은 작품을 확대해 놓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크기의 변화가 인간과 문자의 권력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대형화는 규모가 아니라 미학이 된다.

-비평은 금보성을 보호해서는 안 된다

금보성비엔날레를 진지하게 평가하려면 작가를 보호하는 비평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랜 시간 한글을 작업했다는 사실도, 작품이 거대하다는 사실도, 한글이라는 한국 고유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사실도 그 자체로 미술사적 가치를 보장하지 않는다.
작품이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그의 선은 한글에서 출발해야만 하는 필연성을 갖는가.
색은 구조를 심화시키는가.
균열은 사유인가, 효과인가.
읽을 수 없는 한글은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만드는가.
거대한 작품은 인간의 몸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한글’이라는 강력한 문화적 이름이 오히려 작품을 대신 설명하게 된다.
그러나 이 질문을 견딘다면 상황은 반대가 된다.
한글이라는 이름을 빌리는 회화가 아니라 회화를 통해 한글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 된다.
비평의 역할은 바로 이 차이를 밝혀내는 것이다.

-금보성의 깊이는 한글을 얼마나 멀리 데려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일본인의 시선에서 금보성의 한글이 흥미로운 이유는 한국의 문자를 사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이미 완성된 문자체계를 작가가 어디까지 흔들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흔들고도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
금보성은 한글을 보존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버리지도 않는다.
그는 한글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계속 변형한다.
그 거리에서 회화가 발생한다.
그래서 금보성 작품의 깊이는 한글을 얼마나 닮게 그렸는가로 판단할 수 없다.
오히려 반대로 물어야 한다.
얼마나 멀리 떠났는데도 한글인가.
이 질문은 금보성 회화를 이해하는 핵심이 될 수 있다.

-한글의 단단함은 형태가 아니라 생존력이다

결국 금보성비엔날레에서 발견하게 되는 한글의 단단함은 직선의 단단함도, 자음의 각진 형태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근원적인 것이다.
변형을 견디는 힘이다.
깨져도 남는다.
확대되어도 남는다.
색으로 분리되어도 남는다.
읽을 수 없게 되어도 어딘가에 한글의 기억이 남는다.

그렇다면 한글의 단단함은 고정된 형태를 지키는 능력이 아니라 변화하면서도 자신의 발생 원리를 잃지 않는 생존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금보성이 오랜 시간 붙잡아 온 것도 어쩌면 글자의 모양이 아니라 바로 그 힘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회화를 한국 전통의 재현이라고 부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는 전통을 보존하기보다 전통이 얼마나 멀리 미래로 이동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있다.
일본의 미학이 ‘間’을 통해 존재와 존재 사이의 침묵을 깊이 바라보았다면, 금보성은 한글의 획과 획 사이에 더 적극적인 질문을 집어넣는다.

무엇이 사라져도 한글은 한글인가.
어디까지 깨뜨려도 문자의 기억은 남는가.
언어를 잃은 한글은 회화가 될 수 있는가.
회화가 인간보다 커졌을 때 문자는 공간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이 계속 살아 있는 한 금보성의 한글은 단순한 문자회화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문자가 자신의 언어적 운명을 벗어나 어디까지 예술로 이동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장이 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금보성비엔날레의 의미를 찾는다.
금보성은 한글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한글의 단단함을 시험하는 작가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계속 깨뜨리고 흔들고 해체했는데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한글이 얼마나 단단한 문자인지를 보게 된다.

금보성 회화의 깊이 또한 그곳에서 시작된다.
한글을 지켜서 남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변화시켜도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금보성비엔날레가 세계미술 앞에 제시할 수 있는 가장 깊고도 단단한 질문이다.

최성민 더파워 기자 Sungmin@th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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