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개 상장사 분석…공시 분기 1.7%p→7분기 뒤 5.4%p 상승
배임·횡령 1심 무죄율 6.2%…“경영판단원칙 명문화 필요”
[더파워 이경호 기자] 배임 혐의 기소 사실을 공시한 기업들이 이후 현금 보유를 늘리는 경향을 보였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공시 7분기 뒤 현금보유비율 상승폭은 5.4%포인트로, 분석 대상 기업의 평균 현금보유비율 12.0%의 약 45%에 해당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지인엽 동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에게 의뢰한 ‘배임죄 적용이 기업의 위험회피 성향에 미치는 영향’ 연구용역 보고서를 26일 공개했다.
보고서는 2016년부터 2026년까지 배임 기소 사실을 공시한 상장사 119곳을 대상으로 기소 공시 전후 현금보유비율 변화를 분석했다.
분석 결과 배임 기소 공시가 발생한 분기부터 이후 7분기까지 현금보유비율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시가 이뤄진 분기의 현금보유비율은 직전 분기보다 1.7%포인트 높아졌고, 1분기 뒤에는 상승폭이 3.1%포인트로 확대됐다.
7분기 뒤에는 5.4%포인트까지 상승한 것으로 추정됐다.
보고서는 분석 기간인 공시 전후 8분기 동안 대상 기업의 평균 현금보유비율이 12.0%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5.4%포인트의 상승폭이 평균의 약 45%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반면 배임 기소 공시 이전인 8분기 전부터 2분기 전까지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현금보유 증가세가 나타나지 않았다.
보고서는 이를 근거로 공시 이후 나타난 현금보유 확대가 기존 추세의 연장이라기보다 사건 이후 발생한 변화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현금이 대표적인 저위험 자산이라는 점에서 기업 재무정책이 보다 보수적이고 위험회피적으로 변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보고서는 기업의 현금보유 정책이 투자계획과 자금운용 제약, 자산 매각·외부자금 조달 비용 등으로 단기간에 크게 변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소 이후 중장기적으로 현금 비중이 높아진 것은 재무정책 기조 변화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배임·횡령죄의 무죄율도 함께 제시됐다.
2015년부터 2024년까지 배임·횡령죄의 1심 무죄율은 평균 6.2%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형법 전체 범죄 평균 무죄율 3.0%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한경협은 배임죄의 ‘임무 위배’ 등 구성요건과 적용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처벌 수준과 관련해서는 한국이 형법상 일반·업무상 배임죄 외에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경법에 따르면 배임 이득액이 50억원 이상일 경우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이면 3년 이상 유기징역을 적용할 수 있다.
보고서는 미국과 영국은 별도의 배임죄 규정이 없고 관련 행위를 사기·횡령죄나 민사적 책임으로 다루며, 독일과 일본 등은 경영판단원칙을 폭넓게 적용해 고의성이 없는 경영진의 책임을 제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경협은 현행 배임죄 적용이 고의적인 사익 편취를 제재하는 범위를 넘어 위험 감수를 수반하는 정상적인 경영활동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본부장은 “이번 연구는 배임 기소가 최종 유·무죄 판단과 무관하게 기업의 혁신과 투자활동을 위축시킬 소지가 있음을 실증적으로 확인한 것”이라며 “배임죄 구성요건을 명확히 하고 경영판단원칙을 법률에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경호 더파워 기자 lkh@thepower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