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워 유연수 기자] 대한상공회의소가 신산업 육성의 발목을 잡는 ‘구시대적 규제’ 54건을 정부에 공식 건의했다. 연구소는 여전히 네 면의 콘크리트 벽이 있어야 하고, 반도체 공장은 40m마다 창을 내야 하며, 영농형 태양광은 8년 후 철거를 가정해야 하는 등의 규제가 2024년 대한민국 산업현장의 현실이라는 지적이다.
대한상의는 15일 ‘신산업 규제 합리화 건의서’를 국정기획위원회 등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제목의 시리즈 형식을 통해,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는 규제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기업부설연구소의 물리적 조건이다. 기초연구진흥법상 연구소는 ‘고정벽체와 별도 출입문을 갖춘 공간’이어야만 인정된다. 최근에는 부서 간 협업과 유연한 공간 배치가 혁신의 핵심임에도, 세제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여전히 ‘4면 벽’이 필수다. 대한상의는 “창의성을 높이기 위한 개방형 구조가 대세인데,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했다.
반도체 산업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있다. 반도체 팹에는 40m 간격마다 소방 진입창을 설치해야 한다는 규제가 존재하지만, 가연성 가스를 다루는 가스룸과 외부 오염에 민감한 클린룸의 공존 구조상 현실 적용이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불만이다. 물리적 간격보다 공간 특성에 따른 유연한 설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는 영농형 태양광 규제가 대표적이다. 농지법상 농지의 ‘일시적 타용도 사용’은 최대 8년으로 제한돼 있어, 시설 투자 회수에 어려움이 따른다. 태양광과 농작을 병행하는 이 방식은 기후위기 대응과 농가 소득 보완 측면에서 각광받고 있지만, 현행 규제로 확산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태양광 시설 이격거리도 문제다. 현재는 지자체별로 100m에서 1000m까지 기준이 제각각인데, 과학적 검토보다 민원 위주로 설정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상의는 “과도한 이격거리로 인해 적정 부지를 확보하지 못해 사업이 무산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AI 기반 반려동물 인식기술과 공유미용실 관련 규제도 구태를 벗지 못한 사례로 꼽혔다. 반려견 얼굴을 촬영해 개체를 구별하는 AI 기술이 등장했지만, 현재 동물등록제는 여전히 칩과 외장형 인식표만 허용한다. 공유미용실도 샌드박스 실증을 통과했지만, 법령 정비가 지연되고 있다.
이 외에도 반도체공장 방화구획 기준, 소형모듈원전 육성, 글램핑용 조립식 텐트 규제 등 총 54건이 개선 대상에 올랐다.
대한상의는 “글로벌 산업구조가 급변하고 있지만 한국경제는 제자리걸음 중”이라며 “시대에 맞는 유연한 규제 정비를 통해 새로운 질서와 성장의 동력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연수 더파워 기자 news@thepowernews.co.kr